오늘날 국가의 문화정책은 예술 진흥에 머무르지 않고, 국가 정체성의 유지, 산업 경쟁력의 형성, 국제사회에서의 매력과 신뢰 구축에 깊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문화가 시민에게는 ‘우리답게 살아가는 방식’의 언어가 되고, 시장에는 고부가가치 콘텐츠·관광·디자인·브랜드의 원천이 되며, 외교 현장에서는 설득 가능한 이미지와 관계 자본으로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문화정책은 선택적 장식이 아니라, 국가 운영의 기본 기능에 가까운 영역으로 재정의 되고 있습니다.
프랑스가 자주 인용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프랑스는 1959년 드골 정부에서 문화 행정을 독립 부처 수준으로 제도화하며(문화부 창설) 국가가 문화 접근권, 문화유산의 보존, 동시대 창작의 생태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원리를 제도 설계로 적용해 왔습니다. 프랑스 문화부의 초기 미션은 ‘중요한 작품을 가능한 많은 시민에게 접근 가능하게 만드는 것’으로 분명히 제시되어 왔고, 그 방향은 지역 문화 시설 확충과 창작 지원, 문화유산 행정의 정교화로 확장되어 왔습니다.
또 하나의 특징은 ‘보호’의 층위가 매우 두텁다는 점입니다.
프랑스는 언어 정책(프랑스어 보호), 방송·음악·영화의 편성 의무(쿼터), 그리고 영화·영상 산업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하는 기금·세제 구조(CNC)를 결합해, 문화의 공공성과 산업성을 동시에 지키는 정책 조합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이 글은 프랑스 문화정책의 형성과 발전, 문화보호정책의 핵심 장치, 그리고 그 의의를 정리한 뒤, 한국이 K-컬처의 확장 국면에서 무엇을 정책적으로 점검해야 하는지까지 연결해 보겠습니다.
핵심 개념 정리
문화정책: 국가가 문화예술·문화산업·문화유산을 공공 가치로 보고 지원·규율·보호·확산을 수행하는 정책 체계입니다.문화접근권(문화향유권): 거주지, 소득, 학력에 관계없이 문화 활동을 누릴 기회를 시민의 권리로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문화보호정책: 시장 경쟁 속에서 자국의 언어·콘텐츠·창작 생태계가 구조적으로 약화되지 않도록 법·제도·재정으로 방어선을 구축하는 정책 묶음입니다.
유럽·프랑스 작품 의무(쿼터): 방송·플랫폼에서 유럽 작품과 프랑스어 원작(Original French expression) 편성 비율을 규정해 노출의 최소선을 보장하는 장치입니다.
프랑스 문화정책의 형성: ‘접근권’에서 ‘국가 책무’로
프랑스 문화정책의 출발점은 문화는 개인의 취향 영역에만 두기 어렵고, 공공의 삶의 질과 시민성, 국가의 장기 경쟁력에 직결된다는 문제의식이 행정 조직으로 구체화된 것으로, 1959년 문화부의 제도화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문화부의 출범과 함께, 예술·문학·건축·유산·기록·공연 등 분산돼 있던 문화 행정 영역이 보다 통합적으로 다뤄지기 시작합니다.말로(André Malraux) 시기 정책을 상징하는 장치가 ‘문화의 집(Maison de la Culture)’입니다.
문화의 집은 수도 중심의 문화 향유 구조를 흔들고, 지역 시민이 연극·음악·영화·미술을 생활권에서 경험하도록 설계된 공공 문화 인프라였습니다. “각 데파르트망에 하나씩”이라는 야심이 제기되었고, 실제로 여러 문화의 집이 설치되며 이후 유럽 각국의 문화센터 모델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프랑스가 문화정책을 ‘창작자 지원’과 ‘시민 접근권’의 동시 과제로 묶었다는 점입니다. 문화시설은 공연장·전시장이라는 공간 확충에 머무르지 않고, 지역 문화 행정 조직(예: 지역 문화행정 기구 확대)과 연결되면서 정책의 지속성을 확보해 왔습니다.
정리하면, 프랑스 문화정책의 1차 의의는 문화 향유의 기회를 ‘권리’와 ‘국가 책무’로 전환한 데 있습니다. 문화는 국가가 배치하는 예산 항목이기 전에, 시민의 삶을 구조적으로 평등하게 만드는 공공재의 성격을 가진다는 판단이 제도 설계에 반영된 셈입니다.
프랑스 문화보호정책의 핵심 도구: 언어·쿼터·재원 구조
프랑스 문화보호정책은 “자유경쟁을 인정하되, 문화의 영역에는 별도의 규칙이 필요하다”는 철학 위에서 작동해 왔습니다. 그 철학이 정책 도구로 변환된 대표 사례가 언어 정책, 편성 의무(쿼터), 그리고 CNC 중심의 재원 시스템입니다.첫째, 언어 보호는 프랑스 문화보호정책의 가장 상징적인 층위입니다. 1994년 제정된 ‘Toubon 법(프랑스어 사용법)’은 공공 영역뿐 아니라 광고, 노동 현장 문서, 상업적 커뮤니케이션에서 프랑스어 사용을 요구하는 체계를 갖고 있습니다. 해외 기업의 프랑스 시장 진출 과정에서도 광고·라벨·설명서가 프랑스어로 제공되어야 한다는 점이 반복적으로 안내될 정도로, 언어를 소비자 보호이자 정체성 정책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둘째, 방송·음악·영상 분야의 쿼터 정책은 ‘노출의 최소선’을 제도적으로
보장합니다. 라디오의 경우 프랑스어(또는 프랑스 내 지역 언어) 노래가 일정 비율
이상 편성되어야 하며, 신인·신작 비중 요건까지 결합되어 창작 생태계의
세대교체를 정책 목표로 끌어들였습니다.
TV의 경우도 유럽 작품 최소 비율과 프랑스어 원작(Original French
expression) 최소 비율을 규정해, 강력한 글로벌 콘텐츠의 파도 속에서도 자국·유럽
작품이 시청자와 만나는 경로를 유지합니다.
셋째, 프랑스 영화·영상 정책의 ‘힘’은 CNC의 재원 구조에서 나옵니다. CNC는 영화표에 부과되는 세금(TSA), TV 서비스 관련 세금(TST) 등 다양한 유통 기반 부담금을 통해 재원을 마련하고, 그 재원을 다시 제작·배급·산업 규율에 재투자하는 구조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CNC가 “세금 기반의 재원”을 기관의 독립성과 정책 지속성의 토대로 설명하는 대목은 정책 설계 관점에서 특히 중요합니다.
넷째, 디지털 전환 이후의 프랑스는 보호정책을 OTT·VOD 영역까지 확장했습니다. EU
차원의 AVMSD(시청각미디어서비스지침)는 VOD 카탈로그에서 유럽 작품
비중(대표적으로 30% 기준)과 노출(프롬inence) 문제를 규범 틀로 다루고, 프랑스는
이를 자국 제도로 구체화해 왔습니다.
프랑스의 SMAD 관련 2021년 시행령은 주문형 시청각 서비스에 대해 유럽 및
프랑스어 원작 제작 기여, 전시(노출) 관련 규칙 등을 포함하는 체계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연구 보고서들에서는 프랑스가 VOD 사업자에게 프랑스 시장 매출의 일정
비율을 유럽·프랑스 작품에 기여하도록 요구하는 접근이 유럽에서 가장 강한 편에
속한다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국제규범의 층위도 빼기 어렵습니다. UNESCO 2005년 ‘문화표현의 다양성 보호·증진 협약’은 문화재·콘텐츠가 경제적 성격과 문화적 성격을 함께 가진다는 관점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며, 각국이 문화정책을 설계할 정당성을 강화해 왔습니다.
프랑스가 보여준 ‘정체성-산업-권리’의 결합 모델
프랑스 문화정책과 문화보호정책의 의의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문화의 공공성과 산업성을 분리하지 않고, 권리·시장·정체성을 한 세트로 정책 설계했다”는 점으로 모아집니다.첫째, 정체성의 제도화입니다. 언어 정책은 ‘말의 규칙’이 아니라 ‘국가 정체성의 운영 규칙’에 가깝습니다. 세계화 환경에서 영어의 압력이 커지는 가운데, 프랑스는 프랑스어를 공공 커뮤니케이션의 기본 언어로 유지함으로써 국가 정체성의 핵심을 법·행정으로 관리합니다.
둘째, 시장 실패에 대한 교정입니다. 글로벌 시장에서 문화 콘텐츠는 승자독식 구조로 흐르기 쉽고, 노출 경로를 장악한 플랫폼이 소비의 문법까지 좌우할 수 있습니다. 쿼터·투자 의무·기금 체계는 이 시장 실패를 완화하며 창작 생태계의 지속성을 담보하려는 정책적 답변입니다.
셋째, 시민권 관점의 정책입니다. 문화의 집, 지역 문화 인프라 확충, 문화유산 행정은 문화 향유의 기회를 삶의 기반으로 삼아, 지역 격차와 계층 격차를 완화하려는 방향성을 품고 있습니다.
한국에 주는 시사점: K-컬처의 ‘성장 이후’에 필요한 정책 질문
프랑스 사례가 한국에 주는 시사점은 “성공 이후의 정책”에 더 가깝습니다. K-POP, K-드라마, K-영화가 세계적 영향력을 넓혔다는 사실이 곧 문화정책의 과제가 끝났다는 뜻으로 연결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글로벌 플랫폼 경쟁이 심화될수록, 창작 생태계의 지속성, 수익 배분 구조, 지역 문화의 기반, 한국어·한국 문화의 장기 확산 전략이 새롭게 중요해집니다.-
창작 생태계의 재원 구조를 어떻게 안정화할 것인가
프랑스 CNC의 강점은 “유통에서 재원을 걷고, 창작으로 재투자”하는 구조의 일관성에 있습니다. 한국도 영화·방송·플랫폼·통신이 연결된 시대에, 창작 투자 재원을 어떤 방식으로 지속 가능하게 설계할지 검토할 여지가 큽니다. -
노출과 편성의 공정성을 어떻게 담보할 것인가
프랑스의 TV·라디오 쿼터는 문화 보호가 ‘표현의 자유’와 충돌할 수 있다는 논쟁을 동반해 왔지만, 동시에 시장의 노출 편향을 교정하는 장치로 기능해 온 것도 사실입니다. 한국은 OTT 환경에서 ‘비율’만큼이나 ‘추천·메인 노출·검색 가시성’ 같은 프롬inence의 문제를 정책 언어로 다룰 필요가 커지고 있습니다. -
한국어 확산 전략을 문화산업 전략과 연결할 것인가
프랑스는 프랑스어를 국내 보호의 대상이면서 국제 확산의 자산으로도 다루며, 프랑코포니(OIF) 같은 국제 네트워크를 운영해 왔습니다. 한국도 한류의 파급력을 한국어 학습, 번역·자막 생태계, 해외 교육기관 네트워크와 결합하는 방식으로 확장할 수 있습니다. -
‘문화다양성’의 국제 규범을 국내 정책 정당성으로 연결할 것인가
UNESCO 2005 협약이 제공하는 논리는 강력합니다. 문화는 경제재이면서 문화재라는 이중 성격을 가지므로, 국가가 문화정책으로 개입할 정당성이 성립합니다. 한국도 자유무역·플랫폼 경제 환경 속에서 문화정책의 정당성을 설명할 때 이 국제 규범의 언어를 전략적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아래 표는 프랑스 정책 도구를 한국 상황에 대응해 “정책 질문”으로 번역한 정리입니다.
| 정책 축 | 프랑스의 대표 도구 | 의도 | 한국에 던지는 질문 |
|---|---|---|---|
| 언어·정체성 | Toubon 법 | 공공·상업 커뮤니케이션에서 언어 기반 유지 | 한국어 확산을 산업·교육·외교로 연결할 설계가 있는가 |
| 노출·편성 | TV·라디오 쿼터 | 자국·유럽 콘텐츠의 최소 노출선 보장 | OTT 추천·메인 노출의 공정성까지 다룰 수 있는가 |
| 재원·투자 | CNC 기금(유통 기반 부담금) | 유통 수익을 창작으로 환류 | 플랫폼·통신·방송이 연결된 재원 구조를 설계할 수 있는가 |
| 디지털 규율 | AVMSD, SMAD | VOD에도 다양성·투자 의무 적용 | 국내외 플랫폼에 대한 문화정책 원칙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
| 국제 규범 | UNESCO 2005 협약 | 문화정책의 국제적 정당성 확보 | 문화다양성을 국내 정책 논리로 설득력 있게 제시할 수 있는가 |
프랑스 모델의 핵심은 ‘보호’가 아니라 ‘지속성의 설계’
프랑스의 문화정책과 문화보호정책은 보호를 위한 보호에 머물지 않습니다. 문화 향유의 기회를 시민의 권리로 보고, 언어·콘텐츠의 기반을 법과 규율로 유지하며, 창작 생태계를 재원 구조로 지속시키는 ‘설계’에 가깝습니다. 문화부의 제도화, 문화의 집을 통한 지역 접근성 강화, 프랑스어 보호 체계, 라디오·TV·영화·OTT로 이어지는 쿼터와 투자 의무, CNC의 기금 기반 환류 구조는 모두 같은 질문에 답하려는 서로 다른 장치들입니다. “문화가 한 시대의 유행으로 사라지지 않게 하려면, 국가가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한국은 이미 세계가 주목하는 콘텐츠 파워를 구축했습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성장 이후’의 정책 언어입니다. 창작자와 산업의 지속 가능한 수익 구조, 플랫폼 시대의 노출 공정성, 지역 문화 기반의 강화, 한국어 확산의 체계화 같은 과제가 서로 분리되어 보일 수 있으나, 프랑스 사례는 그 과제들이 하나의 정책 철학으로 묶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문화정책은 예산의 크기만으로 평가되기보다, 사회가 문화의 가치를 어떤 규칙으로 지키고 어떤 구조로 키워내는지로 평가됩니다. 그 관점에서 프랑스 모델은 한국 문화정책이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 점검해야 할 기준점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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