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차는 웃긴 장면이 아니라, 우리가 세계를 “읽어버리는 방식”의 은유였다.
나는 오래전부터 돈키호테를 “풍차에 돌진한 사람”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누군가를 놀릴 때 붙이는 별명처럼, “돈키호테 같다”는 말이 먼저 떠올랐다. 그러다 어느 날, 그 말이 너무 편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의 실패를 한 단어로 묶어버리는 편리함.
그래서 오히려 읽어보고 싶어졌다. ‘현실감각 없음’이라는 딱지 뒤에 무엇이
남는지.
이 책은 예상보다 훨씬 수다스럽고, 훨씬 정교하게 웃긴다. 그리고
웃기는 만큼 자주 서늘해진다.
돈키호테는 자기 마음속 세계를 현실 위에 겹쳐
놓는 사람이 아니라, 현실을 “이야기”로 번역해 살아남으려는 사람처럼 보일 때가
있다.
산초 판사는 그 번역기가 과열되지 않게 옆에서 계속 손잡이를 돌리는
존재다.
이 책의 뿌리는 ‘기사도’가 아니라 ‘읽기의 과잉’이다. 책을 너무 읽어 세계가 책처럼 보이게 되는 순간, 인간은 어디까지 책임질 수 있을까?
3) 책 소개
『돈키호테』(정식 제목은 스페인어로
El ingenioso hidalgo don Quijote de la Mancha)는 미겔 데 세르반테스가
쓴 소설로, 1605년 1부, 1615년 2부가 출간된 두 권짜리 작품이다.
스페인 국립도서관(BNE) 설명에 따르면 1부 초판은
1605년 후안 데 라 쿠에스타(Juan de la Cuesta)가 인쇄했고,
서점상
프란시스코 데 로블레스(Francisco de Robles)가 비용을 댔다고
정리된다.
당대에 유행하던 기사도 로망스를 패러디로 시작했지만,
실제로는 늙은 향사가 세계를 오독하며 겪는 “현실의 반작용”을 아주 리얼하게
적는다.
구성 뼈대만 잡아도 규모가 보인다. 1부는 52장, 2부는
74장으로 촘촘하게 이어진다.
한국어 판본은 완역본(대개 2권 이상)부터 축약·각색본까지 스펙트럼이
넓다. 예를 들어 예스24에 소개된 비룡소 판(2010)은
어린이 눈높이에 맞춘 각색임을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목차를 꽤
길게 붙여 “모험의 연쇄”를 살려둔다.
4) ‘핵심 한 문장’
“Who is this that answers us?”
“Yes, I am,” said Sancho; “and I’m proud of it.”
“I believe it,” said Don Juan;
이 짧은 대화가 오래 남는 건, 『돈키호테』가 결국 “정체성”을 다루기
때문이다.
산초는 대개 상식과 속담의 사람으로 읽히지만, 여기서는
자기 이름을 자기 입으로 확정한다. 그리고 “자랑”까지
붙인다.
그 옆에서 상대는 “믿는다”고 답한다. 믿음이란, 사실 확인보다
느슨하면서도 관계를 성립시키는 힘이다.
돈키호테가 세계를 잘못 읽는
사람이라면, 산초는 세계가 자기를 잘못 읽을 때도
자기를 다시 읽어내는 사람이다.
이 책은 계속 묻는다.
우리는 남들이 붙인 이름으로 살 것인지, 아니면 내가 말한 한 문장으로 다시
시작할 것인지.
5) 핵심 내용
돈키호테의 출발은 단순하다. 기사도 소설을 너무 많이 읽고, 자기가 기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이름-말-행동”을 한 번에 갈아끼운다.
그 과정이 우스꽝스러운 이유는, 독자가 보기엔 세계가 전혀 그렇게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주막은 성이 아니고, 대야는 투구가 아니고, 풍차는
거인이 아니다(이 유명한 장면이 왜 상징이 됐는지, 책은 스스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이 소설이 오래 살아남은 이유는 “돈키호테가 틀렸다”에서 끝나지
않아서다.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를 비웃는 동시에, 돈키호테가 의지하는
서사적 질서(약자를 돕고, 불의를 바로잡고, 명예를 지키는
규칙)를 슬쩍 꺼내 보여준다. 그래서 독자는 계속 흔들린다. 저건 미친 짓인가,
아니면 우리가 버린 윤리의 잔상인가.
2부의 장치가 특히 현대적이다. 어떤 인물들은 이미 1부를 “읽고” 돈키호테를
알아본다. 즉, 돈키호테는 자기 자신이 ‘콘텐츠’가 된 세계로
들어간다.
여기에 더해, 1614년에 ‘아벨라네다’라는 이름의 가짜 속편이 먼저 나왔고,
세르반테스는 2부에서 그 상황을 작품 안으로 끌어들인다(진짜가 가짜를 상대하는
메타 게임).
이 지점에서 『돈키호테』는 단순한 모험담이 아니라
허구와 현실의 경계 관리에 대한 소설이 된다.
그리고 산초 판사. 산초는 “현실 담당”이지만, 단지 브레이크만 밟는 인물이 아니다. 어떤 순간엔 돈키호테의 말투를 배워 현실을 포장하고, 어떤 순간엔 돈키호테를 현실로 끌어당기며 협상한다. 그래서 흔히 말하는 “이상 vs 현실” 구도는 시간이 갈수록 섞인다(서로를 닮아가는 과정).
재미있는 건, 우리가 유명하다고 믿는 돈키호테의 말들 중 일부가 사실은 책에 없다는 점이다. 예컨대 “Ladran, Sancho…”로 시작하는 문구는 널리 퍼져 있지만 원문에 없다는 식의 팩트체크가 반복되어 왔다. 이런 오해 자체가 『돈키호테』적인 사건처럼 느껴진다—사람들이 한 작품을 “자기 이야기”로 바꿔 부르기 시작하는 순간, 텍스트는 또 다른 모험을 시작한다.
6) 관점/구조 정리
-
“Yo sé quién soy.”
정체성은 남이 정해주는 문패가 아니라, 스스로 말하는 문장에 가깝다. 돈키호테가 끝까지 놓지 않는 건 ‘사실’이 아니라 ‘자기 서사’다. -
“La libertad, Sancho…”
‘자유’는 이 작품에서 낭만적 장식이 아니라 폭발물처럼 다뤄진다. 풀어주는 행위가 언제나 선이 되지 않는다는 걸, 세르반테스는 코미디로 보여준다. -
“diverse beliefs and perspectives”
한 목소리로 밀어붙이지 않고, 서로 다른 목소리가 부딪치게 만든다. 그래서 이 소설은 ‘정답’보다 ‘충돌’을 남긴다. -
“Ladran, Sancho…”(원문에는 없다는 지적이 많다)
작품 바깥에서 만들어진 ‘명언’이 작품을 대표해버리는 현상 자체가, 이 소설이 말한 “허구의 전염력”을 증명하는 듯하다. -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게 재구성”
판본은 달라도 핵심은 남는다: ‘오독’이 빚는 모험, 그리고 그 오독을 곁에서 조율하는 동행의 리듬.
7) 문장·목소리·구성 ‘해부’
『돈키호테』는 문장 호흡이 “달리기”가 아니라 “말하기” 쪽에 가깝다. 이야기를 빨리 굴리기보다, 설명과 우회로를 붙여 독자를 일부러 늦춘다. 그 지연이 웃음을 만든다. 돈키호테가 한 번 과장하면, 서술이 한 번 더 덧칠하고, 산초가 한 번 더 받아치면서 장면이 두 겹 세 겹으로 부풀어 오른다.
목소리는 늘 약간 비껴 서 있다. 주인공에게 몰입시키는 듯하다가도, “저자들
사이에 의견이 갈린다”는 식의 거리 두기가 끼어들며 믿음을 흔든다(이 흔들림이
소설을 ‘현대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이때 독자는 돈키호테를 판단하는
동시에, 판단하는 자기 자신도 의심하게 된다. “내가 보고 있는 현실은 얼마나
확실하지?”
구성 전환은 대체로 “모험 → 오해의 확대 → 물리적/사회적 반작용 → 임시 봉합”의 반복으로 간다. 반복은 단조로움이 아니라 축적이다. 풍차, 주막, 투구, 마법사—이 장치들이 되풀이될수록 돈키호테의 세계관은 더 단단해지고, 동시에 더 취약해진다. 결국 반복은 “믿음의 강화”이자 “균열의 누적”이 된다.
8) 현실과 이상 사이의 번역
요즘 우리는 기사도 소설 대신 피드와 알고리즘을 읽는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세상은 ‘그대로’가 아니라 ‘내가 본 것들’의 편집본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돈키호테가 무서운 건, 거인을 본 게 아니라
거인을 봤다고 말하는 순간부터다. 말은 세계를 바꾸지 못하지만,
내가 취할 행동을 바꾼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
“세상은 원래 그래.”
“다들 그렇게 해.”
이런
일상 문장들은 생각보다 쉽게 우리를 가둔다. 돈키호테는 그 반대편에 있다. 그는
“세상은 이렇게 읽힐 수도 있다”는 쪽으로 달려간다. 그래서 웃기고, 그래서
위험하고, 그래서 가끔 부럽다.
한편 산초는 우리 안의 현실감각이기도 하지만, 더 정확히는
현실과 이상 사이의 번역 능력이다.
큰 꿈을 가진 사람이
망가지는 순간은 대개 꿈이 커서가 아니라, 꿈을 현실에 연결하는 문장이 없어서다.
산초의 속담은 가끔 촌스럽지만, 그 촌스러움이 연결 장치가 된다.
또 하나. 가짜 속편(아벨라네다)과 그에 대한 대응은, 오늘날의 ‘카피 콘텐츠’ ‘밈’
‘패러디’ 환경과 닮아 있다. 진짜는 늘 가짜보다 늦게 도착한다. 그래서 진짜는
종종 “내가 진짜임”을 설명해야 한다.
그 설명이 지겨워지는 순간, 우리는
돈키호테를 비웃기 시작한다. 하지만 비웃는 동안에도, 우리 역시 어떤 이야기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이 자꾸 살아나는 이유는 아마도 여기에 있다. 돈키호테는
실패하지만, 실패를 의미로 바꾸는 기술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도 어떤 실패를 그렇게 다뤄본 적이 있지 않나.
오늘 당신은 어떤
“풍차”를 거인이라고 부르고 있는가?
9) 인사이트
-
내 세계관이 과열될 때, 번역자(산초)가 필요하다는 걸 인정해볼 수 있다.
-
“사실”보다 “이야기”가 먼저 움직일 때가 있음을 자각하고, 행동을 한 박자 늦춰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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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 붙인 라벨 대신, 내가 말할 수 있는 짧은 자기 문장을 만들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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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실패는 ‘무능’이 아니라, 신념의 구조를 드러내는 데이터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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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는 회피가 아니라, 때로는 현실을 견디는 윤리적 기술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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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가 먼저 퍼진다”는 환경에서, 진짜가 할 일은 속도 경쟁이 아니라 문장의 설득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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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이상을 비웃기 전에, 그 이상이 붙들고 있는 결핍/상처/윤리를 먼저 봐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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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확신이 단단해질수록, 반대로 내 확신을 흔드는 타인의 목소리를 일부러 가까이 두어볼 만하다.
10) 눈에 들어온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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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 sé quién soy.”
“나는 내가 누군지 안다.”로 옮기면 너무 단단해서 오히려 슬프다.
정체성은 확신이라기보다 버팀목일 때가 많다.
돈키호테의 모든 과장은, 이 짧은 문장을 지키려는 몸부림처럼 보이기도 한다. -
“La libertad, Sancho…”
‘자유’가 여기서는 낭만이 아니라 책임의 무게로 다가온다.
누군가를 풀어주는 일이, 언제나 누군가를 살리는 일은 아니다.
그 복잡함을 설교가 아니라 코미디로 보여주는 게 세르반테스의 잔혹한 친절이다. -
“Originally conceived as a parody…”
패러디로 시작한 작품이, 결국 시대를 대표하는 소설이 된 건 아이러니하다.
아마도 패러디는 ‘대상’을 비웃는 게 아니라, ‘대상을 믿었던 나’를 들추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독자는 웃다가 갑자기 자기 얼굴을 본다. -
“Ladran, Sancho…”
유명한 명언이 원문에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이 작품답다.
사람들은 돈키호테를 계속 쓰고, 계속 덧붙이고, 계속 바꿔 부른다.
텍스트는 닫힌 책이 아니라, 사회가 들고 달리는 깃발이 된다. -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게 재구성…”
돈키호테는 ‘난해한 고전’이기 전에 ‘모험담’이기도 하다.
판본이 달라도 핵심 리듬—오해, 동행, 반작용—은 살아남는다.
처음 접근이 두렵다면, 축약본으로 리듬을 먼저 익히는 것도 한 방법이다.
11) 저자 소개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Miguel de Cervantes Saavedra)는 스페인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극작가·시인으로, 『돈키호테』의 저자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스페인 알칼라 데 에나레스에서 1547년에 태어난 것으로 보이며(세례
기록 등을 근거로 생일은 9월 29일 전후로 추정되곤 한다), 1616년 마드리드에서
사망했다.
다만 사망일 표기는 자료에 따라 4월 22일 또는 23일로
엇갈린다(흔히 “셰익스피어와 같은 날”이라는 문구도 널리 유통되지만, 표기·달력
차이 등으로 단정은 조심스럽다).
그의 삶은 문학적 상상력만큼이나 파란이 많았다. 브리태니커 요약과 여러 전기
자료는 그가 레판토 해전(1571)에 참전해 부상을 입었고, 이후 알제리에서 약 5년간
포로 생활을 했다고 전한다.
이 경험은 그의 작품 곳곳(특히 포로/탈출/권력의
풍경)으로 스며든다.
귀국 뒤에도 경제적 어려움과 관직 생활, 법적 곤란이
반복되었고, 이런 굴곡이 『돈키호테』의 사회 풍자와 인간 관찰을 두텁게
만들었다는 해석이 많다.
『돈키호테』 외에도 모범소설집(Novelas ejemplares, 1613)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세르반테스가 “현대소설의 문을 열었다”는 평가는
단정이라기보다 누적된 독서 경험의 합에 가깝다. 그의 소설은 한 인간을
조롱하면서도, 조롱을 통해 인간을 구해내려 한다. 그 양가성 때문에, 400년 넘게
새 독자에게 다시 읽히고 다시 오해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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